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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0-30 10:26:30
  • 수정 2017-10-30 11: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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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5년10월 6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7년째 바둑데이트를 즐기는 임정순(63) 김원기(68) 부부가 화성시 융릉건릉 입구에서 포즈.

나를 위해 서로를 위해 우리를 위해 격렬하게 살아왔던 날들이 어느 덧 수 십 년이 흘렀습니다. 한 평생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원한 친구인 남편 그리고 아내. 부부가 된 후 서로를 돌아볼 겨를 없이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라도 소통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바둑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부러운 것이 없겠지요. 바둑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늙어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0월 초 경기도 화성시에서는 '정조대왕 효 축제'가 열렸다. 축제의 여러 행사 중 바둑 팬들의 관심은 역시 바둑대회. 그런데 화성시는 사도세자와 정도대왕의 효에 관한 얘기가 스며있는 곳이어서인지 가족페어부 경기가 가장 눈길을 모았다. 부자팀 모녀팀 형제팀 자매팀 남매님 연인팀 조손팀 부부팀….

주변 참가자들이 아들 손자뻘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온화한 분위기를 주도하던 김원기(68) 임정순(63) 부부. 나란히 앉아 상대의 한 수와 우리의 한수를 오롯이 생각하며 행마하는 모습. 바둑을 즐기는 대표적인 표정이었다. 행사진행을 맡은 화성바둑협회 임원들도 대회의 격을 높여준 팀이라며 시상식 때 이들 부부의 열성을 치하하기도.

알고 보니 그들은 타이젬 인기동호회 '좋은친구'의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바둑은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었고, 이제는 끝까지 갈 동무가 되었다고 했다. 다정하게 융릉건릉을 나란히 걷는 부부의 틈새로 기자가 끼어들어 잠시 훼방꾼이 되었다.

▲ 부부가 한 팀이 되어 아들뻘 팀과 대국하고 있다.

"저희 집은 4남매인데, 형제들이 모이게 되면 저마다 바둑을 둡니다. 일체 술판 고스톱판은 없어요. 딸 아들 어머님까지도 합세합니다. 지난 추석에도 그랬어요. "

첫 마디부터 바둑예찬론을 들이민다. 하긴 집안마다 바둑을 좋아하는 집안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5단 실력의 남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내의 기력까지 수준급이라서 일단 놀랐다.

아내는 60대의 적지 않은 나이에 2단 정도. 그 정도의 기력이라면 어떤 모임 어떤 상대와도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남편에게서 바둑을 배운 것일까. "제가 아가씨 때 친구가 아버지랑 바둑 두는 모습에 꽂혔어요.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어서 저도 그 이후 바둑을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기회를 보고 있는 차에 운명처럼 바둑을 둘 줄 아는 남편과 연애를 하게 되었죠."

부부는 연애를 하면서 바둑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리 대단한 고수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바둑가족의 일원인 남편은 '바둑 두는' 아내를 그리고 있던 차에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으로 데이트장소를 택했다. 아가씨가 우중충한 기원에 발을 들이는 것이 어려울 때였지만 아내는 결코 지루함 없이 받아들였다. 오히려 남편의 바둑실력에 감탄할 정도로 바둑 맛을 들이게 되었고, '복기'는 늘 뒤풀이 안주꺼리가 되었고, 그들 선남선녀는 정이 안 들래야 안들 수 없었다.

아내는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남편의 고모부가 사장인 회사 경리사원이었으니 그들은 쉽게 인연이 되었다. 부부는 대구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다, 30대 초반에 경기도 부천으로 사업차 올라 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남편이 은퇴한 지는 수 년 전인데, 오히려 둘이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저 좋단다.

▲ 융릉앞에서 부부는 아내의 초보자시절을 회상하면서 잠시 티격태격하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흔히 자동차운전과 바둑은 남편에게 배우게 되면 부부간 의가 깨진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예외였을까. 배움의 과정 속에서 어려움은 없었냐고 묻자 그들은 곧 티격태격.

"남편은 사부님으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좀 다정다감하게 설명해주고 해야지 너무 꾹 누르니까 별로예요!"

"실컷 가르쳐주니까 이제 와서 딴 소리하시네요. 다 많이 늘라고 한 것이지 그걸 이해 못하면 안 되지!"

그래도 꿋꿋하게 배워준 아내가 참으로 대견하단다. 요즘은 어느 정도 아내의 기력이 되니까 타이젬 동호회에서 다른 사부에게서 많이 배운다고.

이들 부부는 '좋은친구'의 창단멤버란다. 남편의 ID는 '흑백파도'이며 아내는 '대지129'. 아내는 펄벅의 대지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타이젬에서 처음 동호회를 만들 때 30명의 회원이 되어야 마크를 달 수 있었어요. 25명까지는 모였는데 나머지 숫자가 안 채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도 마크를 달기 위해서 넣었던 것이죠. 지금은 더 활동을 많이 하는 열혈멤버가 되었지만요."

▲ 가족페어부 시상식에서 단란가족상을 수상하게 되자 즐거워하는 부부.

전국 각지로 바둑여행을 매주 다니게 되어서 부부는 최근 굉장히 즐겁다. 데이트코스로 바둑대회에 나란히 참여하게 된 지는 7년쯤부터. 요즘은 전국대회를 가더라고 동호인부가 있어서 참가할 부문이 많고, 또 '좋은친구' 동호회원들이 함께 바둑여행을 나설 때도 있단다. 제천의 청풍명월배, 괴산의 선국암대회, 화성의 효축제, 정선의 아리랑제, 심지어 해외대회까지 경험했다. 다녀온 곳도 많고 또 다녀 올 곳도 무진장 많단다.

"죽을 때까지 다닐 겁니다. 진짜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은 바둑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희 같은 부부가 어디 가서 노인네 취급 안 받고 손자뻘과 이렇게 다정하게 어울리겠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바둑을 평생의 친구로 삼은 것은 대단히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부부는 승용차 트렁크에 바둑판을 싣고 다닌다. 납작한 나무바둑판도 있고 타이젬에서 기념품으로 제작한 휴대용바둑판도 있었다. 요즘은 등산도 자주하고 마실도 자주 다닌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쉬고 싶으면 그냥 벤치에 앉아서 바둑판을 꺼낸다고. 수락산 치마바위에서 한판을 두면 신선부부가 따로 없다며 자랑이다.

"사실은 제가 몇 해 전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았어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업도 중단될 위기였죠. 그때 아내가 사업이랑 제병수발을 함께 드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아프기 전에는 뒷동산 마실 다니는 수준이었지만 그 뒤로는 아예 등산복으로 무장하고 산을 찾죠. 아내가 제 귀중한 등산친구요 바둑친굽니다."

부부는 그래서 몸 건강은 등산으로, 정신 건강은 바둑으로 지킬 수 있으니 행복하단다. 언제 어디서나 바둑판은 함께 들고 떠나난다.

▲ 자신의 승용차 위에서 휴대용 바둑판을 꺼내 보이는 부부. 바둑여행의 필수품이라고.

여전히 펄벅의 '대지'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인 아내는 바둑자랑을 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까지 온 것도 힘들었지만, 얼마까지는 더 늘고 싶어요. 타이젬 고수바둑을 관전하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요. 프로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서 '저기 놓으면 좋을 건데…'하면 진짜 딱 거길 두는 거예요. 그 쾌감은 말로 할 수 없어요!"

아이마냥 즐거워하는 아내에게 용기를 또 주는 남편이다. "이 사람이 저보다 계가는 더 잘해요. 판수만 쌓이면 늘 바둑이죠. 이 나이에도 뭔가 늘고 싶어 한다는 게 대단한 것이잖아요."

함께 하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60대 노부부의 대화 한 자락이다. 늘 건강하시고 신선이 될 때까지 바둑과 친구가 되길 바라는 맘이다.


"부부란 둘이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반고흐)

▲ 바둑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것 중의 하나는 나이고하를 떠나서 전국의 바둑친구들을 사귀는 일이라고. 사진은 이들 부부(왼쪽)과 강릉에서 온 가족들과 다정히 한 컷.

▲ 부부의 바둑사랑은 신선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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