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7-10-30 10:13:52
  • 수정 2017-10-30 11:02:51
기사수정
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5년 6월 21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강원도 양양군을 찾은 날은 화사한 초여름 날씨였다.

타이젬을 즐기는 유저를 찾아 나서는 길은 소개팅을 앞둔 솔로처럼 기대되고 설레기 마련. 특히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사는 유저들보다는 중소도시에 사는 분들이 좀 더 고전적인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번에 소개드릴 유저는 국토 우상단에 위치한 강원도 양양에 사는 타이젬마니아 '양양지회'님이다. ID는 한자 襄陽支會를 쓴다.

襄陽支會님은 타이젬에 하루 20시간을 접속해있는 기자와 수 삼 년 전부터 심심찮게 쪽지를 통해 인사를 나누었다. 襄陽支會님은 기자의 얼굴도 모르면서 마치 오래된 친구마냥, 어딜 취재갔다 오면 귀신같이 알고는 '잘 갔다 오셨냐?'고 안부도 물어주곤 했다.

지난 2월인가. 襄陽支會님은 은연중에 '몸이 아프다'는 말을 처음 꺼냈다. 그 이전까지는 ID만으로 친분이 있었고, 개인사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요즘 강원도에서도 바둑행사가 자주 벌어지곤 하여, 강원도라고 하면 과거처럼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자가 취재를 한번 가려한다고 하자, 그때서야 힘든 얘기를 꺼낸 것.

"오후에 식사와 소주 한잔은 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아니면 예정대로 오시면 됩니다." '소주 한잔'과 '병원 입원'이라는 상반된 얘기가 기자의 머리를 혼란하게 만들었지만, 일단 내비게이션에 '양양시장'을 찍고 달렸다.

선명한 단청과 유채꽃 만발한 강릉에서도 1시간 정도를 더 달리니 '해오름의 고장' 양양군이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장날이어서 저잣거리에 구경할 것도 많았지만, 襄陽支會님을 만나야 하니 발 걸음이 바빴다. 약속장소인 농협이 눈에 들어오자, '몸이 불편하다'고 한 대목이 적잖이 신경 쓰인다. '괜히 성가시게 한 것은 아닐까.'

▲ 襄陽支會님은 굉장히 건장한 호걸풍이었다.

襄陽支會님은 의외로 건장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문득 무슨 증을 하나 보여준다. 장애증서였다. "겉보기엔 아픈 사람으로 안보이죠. 심장과 대동맥 수술로 질병 장애2급이며, 마약 등 기타 복용으로 심신장애 1급입니다. 쉽게 말하면 심장질환이기 때문에 상체 절반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襄陽支會님의 병세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무거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기자는 믿지 못했다. 사실 보통 성인의 모습이었고 예전엔 기골이 장대했을 것이라는 느낌은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도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25세 때부터 세무회계를 했고, 그 이전에는 국정감사팀에 근무도 했다. 30대부터 그는 돈을 갈구리로 긁었던 사업가였다. 설악산 아래 액세서리 사업이 몹시 잘되었고, 양양시장 내 번영회 회장까지도 했다. 그런데 왜 그는 멀쩡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심한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돈 버는 재미에 별다른 취미도 없고 다른 모든 것은 흥미가 없었어요. 13년 전에 지금의 식당 옆 점포에서 식육점을 같이 했어요. 굉장히 잘 되었어요. 소시장에서 직접 소를 골라서 들여오곤 했었는데, 한번은 그 소가 현실에서도 자꾸 보이는 겁니다. '아, 이젠 (식육점을) 하지 말라는 모양이구나'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얼마못가서 쓰러졌죠."

가슴이 아픈 질환은 부친 때부터 있었던 희귀성난치병으로 유전적인 면도 있지만, 불교신자인 자신이 현실을 다스리지 못하고 욕심 때문에 때를 놓친 점을 아쉬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욕심 때문에 제가 쓰러진 것이죠. 그 후로도 식육점 사업은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쉽게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지요. 병원에 들어갔다 나왔다 거듭하다 결국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게 되었죠."

아직 창창한 50대인 그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태어나서 양양에서 잔뼈가 굵은 그로서는 이곳 양양이 삶의 터전이었고, 그 터전을 바탕으로 누구 못지않게 잘 나가던 호인이요 걸인이었기 때문이다.

지병으로 쓰러진지 13년째가 된 지금도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단다. 아내가 힘든 식당일을 혼자 하게 된 것도 미안하고, 무엇보다 셔터를 내리는 것조차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롭다. 물론 지금은 아들 둘이 직장에 다니고 있고,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죽을 맛이었다.

▲ 가재도구 중 보자기로 덮여있는 부분이 유독 많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들추자, 그의 왕성했던, 그러나 숨기고 싶었던 이력 몇 가지가 눈에 띈다. 양양시장 번영회회장이며 적십자 봉사단으로 20여년을 넘게 일한 기념쟁반도 있다. 그리고 사자상을 보니 그는 라이온스클럽 회원이기도 했다.

"여보, 술 한 병 더 줘요!"
아내는 병자인 남편이 술을 한 병 더 내어달라는데도 싫은 내색이 없다. 본의 아니게 낮술 상대가 된 기자가 오히려 난감해진다.

"아니, 술 마셔도 되나요?"
"약이 너무 쓰기 때문에 통증을 잊게 하는 데는 술이 좋은 면도 있어요. 보통은 그래도 잘 안마시지만,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반가운 친구가 멀리서 왔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아니겠어요? 하하"

그는 오전에 약을 먹으면 점심때나 되어서 깬단다. 병원에서 임상실험을 하고 있는데 굉장히 약이 독하단다. 한번은 팔순을 넘긴 그의 노모가 영양제인줄 알고 손톱 절반크기의 약을 먹었다가 3일간 일어나질 못할 정도로 독한 약이었다. "조금 덜 독한 약은 비싸기 때문에 엄두를 못내요. 임상실험을 하게 되면 병원에서 약값의 80%를 대고 본인은 10% 부담이에요. 그래도 한 달에 50만원씩 이상 들어가죠."

그때서야 기자와의 약속이 오후1시도 아니고 1시30분도 아닌 1시10분인 이유를 알았다. 약 먹는 시간이 오전9시면 잠이 들어서 1시쯤 깬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뜻에서 1시10분을 약속시간으로 잡은 것이다. 그리고 또 오후3시 경이면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정신을 잃을 때도 있단다. 10분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

꼭 돈 때문에 독한 약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쓰러졌을 때 강릉아산병원 선생님이 저를 살려보려고 3일 밤낮을 같이 지냈다고 해요. 따라서 제겐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에, 제가 그분의 연구를 위해서 제 몸을 드리는 것이죠."

그는 그동안 살면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만약 그가 잘못되더라고 병원 탓을 하지 말라고 식구들에게도 충분히 말해주었다. 심지어 또 쓰러지게 되면 식구들을 자신이 못 알아볼까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써놓고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고 했다.

▲ 타이젬은 그가 쓰러진 후에 찾은 단 하나의 친구였다.

"정신적으로도 쇠약하니 우울증도 생겼어요. 한 때 잘 나가다가 이렇게 몰락했으니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나 바둑을 두면 즐겁죠. 장시간 고통도 잊을 수 있고, 타인과의 단절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친구가 많아졌습니다."

그는 타이젬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주문진에 건어물을 취급하는 모 사장을 만나러 갔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박성균 사범을 만나게 되었다. 박사범 또한 불교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고, 타이젬 불교동호회도 소개해주어서 활동한 적도 있다. 가끔 오대산 월정사에서 행사를 벌일 때면 같이 참여한 인연도 있다고.

"타이젬에는 바둑을 취미로 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어 좋아요. 그래서 가끔 사범님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기우들을 만나러 가기도 합니다. 박성균 사범 뿐만 아니라 김일환 프로, 황원순 사범 등도 타이젬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도 한결같이 타이젬 바둑을 권했죠. 타이젬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준 도구에요. 맘이 괴롭고 힘들 때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동네아저씨들이 고수부지 평상에서 바둑을 두는 걸 보고 그 역시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다. 스무살 넘어서 한 판 두 판 두다가, 친구가 기원을 해서 한 1년 정도 다닌 게 바둑과의 큰 인연이었다. 지금은 타이젬 1급을 두며 기원 급수로는 6급 쯤 된다고. 그가 바둑을 알았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바둑마저 없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니까.

"건강했을 때는 돈을 버느라 취미가 없었어요. 오히려 몸이 불편해지니까 타이젬이라는 '절친'이 생겼죠. 아마 평생 갈 것 같아요."

▲ 襄陽支會은 외형적이며 활달한 리더십을 가진 사
람이어서 오프 모임도 15개에 달할 정도였단다. 게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인 적십자활동은 계속하고 있
다고 한다. 20년 근속 표창을 들어보이고 있다.

키 180에 75kg이었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178에 57kg까지 떨어졌다. 고생하다 성공한 입지적전인 사람들은 간혹 알려지곤 하지만, 잘 나가다 몰락한 사람이 나머지 인생을 어찌 살았는지에 관해서는 들려오는 얘기가 잘 없다. '골골 70년'이라고, 주변에서는 오래 살 것 같다고 덕담한다. 그러나 그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이니, 지금이라도 남은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내에게 무거운 짊을 나눠 들어주고 싶죠. 건강할 때는 그것마저도 안 해주었다는 후회가 생깁니다. 아내도 강원도 사람이라 무뚝뚝해서 그렇지, 말할 수 없이 괴로울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죠. 그래서 지금은 가정 일도 하면서 외조를 합니다. 빨래도 돌리고 설거지도 하고….부부간 체조도 같이 하고,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아내가 절 위해서 술을 가끔 마셔도 줍니다."

襄陽支會님은 건장한 가장으로서의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단다. 그에게 삶 그 자체가 목적이며 타이젬은 존재의 이유였다.

"이젠 빨리 가고 싶다는 얘기 안합니다. 지인들을 만나면 즐겁게 딱 한잔 할 수 있게끔 건강도 스스로 챙깁니다. 착하게 맘을 먹고 열심히 지금을 살아갈 겁니다. 건강했던 제가 이렇게 하루 아침에 건강을 잃었듯, 건강이 어느날 돌아올 지 알 수 없잖아요. 타이젬 유저여러분! 담배는 꼭 끊으세요."


▲ 많은 약 봉지가 그의 고단한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 그러나 그는 늘 양양시장을 지키면서 찾아올 타
이젬 기우들을 언제든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화이팅! 襄陽支會!'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ww.badukilbo.com/news/view.php?idx=27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