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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0-30 10:10:42
  • 수정 2017-10-30 11: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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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타이젬 '나는 유저다'에서 2015년 3월 16일에 쓰여진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 '줄그은호박'은 타이젬 아카데미가 생기기 이전부터 많은 유저들과 바둑강의로 소통하며 지낸 분이다. 올해 68세로 열정만점의 노신사였다.

"타이젬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일류프로들 대국을 관전하는 것도 장점이지만, 음악방과 강의방이 있다는 게 엄청난 강점이지!"

자문자답이다. 딱 한눈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눌러쓴 모자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열정 하나로 뭇 하수님들에게 바둑속성강좌를 십수년째 해오고 있는 타이젬 의인이었다. 그는 타이젬 터줏대감 아니랄까봐 카페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설교'를 시작했다. '줄그은호박'은 깐깐해 보이는 노신사였다.

수박은 반듯하고 도회풍이나 호박은 울퉁불퉁하고 시골풍으로 생겼다. 수박은 얼음과 조합이 맞는 여름식품이지만 호박은 사계절 먹을 수 있는 건강식이다. 호박은 수박에 대해 열성(劣性)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김새 때문이다. 게다가 '줄 그은' 호박이라면 자신을 낮추거나 감추면서까지 수박을 닮고 싶은 열망이 들어간 것일 터. 기실 내면은 충실하지만 자신을 나타나고 싶지 않을 때 줄 몇 개를 그어서 자신을 위장 은폐하고 싶었을 것이다.

줄그은호박 9단은 프로는 아니지만 바둑강의는 프로다. 타이젬 초창기 아카데미제도가 생기기 이전부터 고수1방에서 매일 바둑강의를 했고 지금도 하수님들의 방향조타수 노릇을 한다. 줄그은호박의 무료 강의방엔 2~300명씩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니, 모 아카데미 사범은 공개강의 시간이 겹친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 지금은 고수2방에서 월 수 금 6시에 정착했다.

그는 아침에 눈 뜨면 타이젬을 켜고 저녁에 잘 때 타이젬을 끈다. 외식을 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타이젬에서 산다. 그는 현재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로 타이젬을 삼는다. 그 외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다 끊어버렸단다. 그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며 왜 그토록 돈도 생기지 않는 강의에 열중하는 지 평소에 몹시 궁금했다.

▲ 타이젬이 세상과 통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줄그은호박은 아내를 비명에 잃은 뒤 세상일을 하기 힘들었다며 애틋한 사연을 소개했다.

줄그은호박은 젊었을 때 이력서를 내기만 하면 거의 다 ok였을만큼 소위 스펙이 좋다. 'KS'라는 이니셜은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코스인 경기고 서울대출신을 뜻한다. 그것도 당시 최고학부 법대출신이다. 올해 68세로 자식들 3명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홀로 살면서도 건강보험료를 10만원 가까이 내고 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다고 한다.

혼자사시면서 독산동 골방에서 지낸 이유가 특별히 있을까. 원래는 홈그라운드는 안양이었다. 안양에 사는 두 제자가 이곳 독산동으로 아예 정착하시라고 했단다. 어느 날 가보니 컴퓨터에 냉장고에 다 설치까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독산동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속성강의로 유명하다. 1년 만에 10급에서 1급이 되었다는 얘기는 있다. 뮤지컬 배우인 아가씨였는데 10급에서 5개월 반 만에 7단이 되기도 했고, 5살짜리 천재꼬마는 4개월 만에 기리를 터득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타이젬 강자가 되기도 했다. 기자는 모 포털사이트에 '줄그은호박'이라고 검색을 해보니 주르르 글이 쏟아진다. 대부분 그에게서 들은 강의가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언제 강1급 되었는지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땐 바둑을 몰랐어. 내가 재수를 하면서 학원을 안가고 기원을 다닌 거야. 맨 처음 기원에 가니까 원장이 나보고 13급이라고 그러더라고. 그렇게 시작해서 재수기간 딱 1년 동안 탑 랭커가 되었지. 내 고향이 효자동이야. 광화문 교육회관 쪽 육교에 광화문기원이라고 있었어. 홍태선 사범이 광화문기원 출신이지. 그때 기원에서 사범도 하고 잠도 자고 그랬어."

그런데도 어떻게 명문대를 들어갈 수 있었을 지 또 궁금해진다. 역시 엘리트들은 머리가 수재급이라서 쉽게 들어가는 것일까. "한번은 기원에서 바둑을 두는데 우리 선친이 내가 바둑 두는 걸 한참 구경하더니, 바둑은 취미 생활로 끝내자고 타이르셨지. 그 뒤 불같이 공부해서 합격했어. 대학 때 내가 한참 바둑에 미쳐서 바둑 책을 사려고 명동 중국대사관 앞 달러골목에서 파지 중에 섞여 들어온 일본 바둑잡지도 구했었지."

▲ 사진이 어색하게 나올까봐 기자도 줄그은호박님옆에 섰다.

푹 눌러썼던 모자 창을 조금씩 위로 젖히더니 계속 말을 이어간다. 역시 과거 열심히 살았을 적을 떠올리면 누구라도 볼륨이 올라가며 열이 생기는 모양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노신사의 바둑사랑이 별 다를 것은 없다. 그가 지금 타이젬에만 몰두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때는 사람만나는 것이 너무 싫었고, 이젠 조금 맘이 편해졌어. 사업을 하다가 IMF위기 때 큰 낭패를 보았는데, 그 충격 때문에 사람이 싫어졌지. 내가 잘나갔을 때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망가진 나를 보여주기 싫었지."

그래서 십 수년 간을 타이젬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올해 68세라면 50줄에 맞이한 IMF였고 충분히 재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인생사일 수도 있고 또는 밝히기 싫은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은둔의 이유가 그때 실패 때문이었다면 좀 비약이란 생각이다. 다시 물었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그 좋은 간판으로 재기를 꿈꾸지 않았는지를.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는 얘기를 이어갔다. "사업에 위기가 닥쳤을 때 아내를 임시로 친정에 보낸 적이 있었어. 그런데 아내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그 후로는 영영 보지 못하게 되었어. 그 사건이 아직도 내겐 죄의식으로 남아서 만사가 싫어진 게야. 그 후 숨어 살게 되었지. 명절 때가 되면 아이들은 와서 얼굴만 보고 가. 아내가 먼저 떠난 후 아이들은 혼자 키웠지."

부인을 굉장히 사랑했을까. "사랑까지는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는 좋았지. 아내가 먼저 내게 프러포즈했어. 결혼 후 내가 마음고생을 좀 시켰어. 젊었을 때 내가 한량이었거든. 이제 철이 들었는데 막상 갚을 기회도 없고 하니까…. 그 후 20년 동안 여자 손목도 한 번 잡은 일이 없어."

줄그은호박은 맘에 묻어둔 얘기를 속 시원히 해댔다. 그가 타이젬과 여생을 함께 하기로 한 이유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되었다. 타이젬에서는 자신을 늘 반겨주었다. 그래서 문득 나를 반겨주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바둑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과 입은 살아있으니까(웃음), 타이젬 바둑은 할 수 있어. 나한테 바둑을 배우는 사람이 바둑이 괜찮다싶을 정도로 바둑을 가르쳐주지. 이 친구들이 배우다보니 고맙게 생각이 되었든지 5~6명씩 모여서 '벙개'도 하고 가끔씩 선물도 주고 그래. 요즘 사는 낙이야. 허허"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왜 다들 수박이 되려고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 자유야. 마치 줄긋는 게 내 자유인 것이지.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고? 어떻게 긋느냐에 따라 나처럼 멋진 줄그은 호박이 될 수 있어.

'호박에 줄긋기'라는 말이 있다. 뭔가 염색체부족이라는 것처럼, 비슷하게는 하려고 했지만 뜨뜻미지근할 때 흔히 쓴다. 수박이 되어야 하는데 호박이 되었다는 건 호박의 진면목을 폄하하는 말이다. 호박은 약재로도 식용으로도 쓰이는 고귀한 것이다. 줄그은호박은 타이젬에서만은 수박보다 훨씬 뛰어난 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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