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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1-14 20:37:00
  • 수정 2022-11-14 23: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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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출신 선수로서 이창호배에서 첫 우승한 양창연.


“90대 1 정도 될까요?” 


양창연은 쟁쟁한 시니어 여성선수들이 총 출동한 이창호배에서 자신의 우승 확률을 월드컵 우승국 배당에 빗댔다. 


진짜 66명의 선수 중 김희중 최호철 조민수 전유진 이루비 이철주 양덕주 안재성 등 이름깨나 알려진 고수들을 뿌리치고 ‘양창연이 우승한다’에 거는 분은 돈이 넉넉하다든지 바둑정보에 엄청 취약한 사람일 게다. 


그럼에도 양창연은 코를 뚫었다. 고향 전주에서 이창호배가 23년 째 치러지고 있는데 처음으로 전주사람이 우승 맛을 보았단다.  


2014년 인천시장배 우승, 2018년 3·15배에서 우승한 양창연은 물론 강자다. 시니어랭킹 12위며 무엇보다 시니어치고는 나이(72년생)가 창창하기에 실제 우승가능성은 꽤 높을 수 있다. 양창연의 20대 초반으로 돌아가면 대학패왕전 우승도 나온다. 당시 최호철 이영남 고수들도 우승 맛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90대 1은 좀 심하고 한 20대 1 정도될까?


양창연의 우승은 진짜 뜻밖이다. 이번 이창호배에서 진행 총괄을 맡고 있고 전국의 유수한 선수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까지 맡으면서 도저히 바둑두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뜻밖'이 맞다. 


진행 총괄이 뭐 대수냐고? 그는 경기 중 입상한 아이들 상장도 프린터해서 만들어야 하고 대진표 작성도 보기 좋게 디자인해서 A7 수준으로 말끔하게 만드는 것도 그가 맡은 역할 중 하나다. 바둑두는 선수가 이런 실무적인 재주도 아예 전문가 수준이라서 그의 일손은 쉴 틈이 없다고 한다. 엊저녁도 3시간밖에 못 잤다고 했다. 

 

▲'천적' 조민수와의 경기에서 십수년동안 15연패 끝에 처음으로 판맛을 보았다는 양창연.


양창연은 권병훈과 함께 시드를 받아서 16강부터 출전하여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16강에서 대구주먹 박강수를 꺾었고 바둑고를 졸업하고 여자강호로 자리매김한 서수경도 꺾어 단박에 4강에 진출했다. 여기까지는 대진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그들이 약하다는 게 아니고, 조민수 김희중 전유진 이루비 최호철 양덕주 안재성 이철주 등 소문난 이름들은 만나지 않았으니 운이 좋다는 말이다. 


4강에서는 이들 이름을 피할 순 없다. 양창연도 잘 안다. 천적 조민수가 4강에서 기다린다. 


“아휴, 여기까지죠 입상한 아이들 상장 만들어줄 시간도 다가오고… 음료수도 모자라나 봐요. 저를 찾는 전화가 빗발 치네요. 이젠 진행봐야죠. 하하.”


천하의 조민수와는 여태 얼추 열 다섯 번 정도 만나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고양이와 생쥐가 만나 싸운다고 해도 매번 생쥐가 잡혀 먹히진 않을 테고 고양이에게 스크래치 한번은 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중앙에 대형스키장을 만든 조민수는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반면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고개만 연신 끄덕이던(계가하는 듯) 양창연은 사부작사부작 따라붙더니, 스키장 주변을 개간하여 미세하게는 만드는데까지는 성공. 


그 시각, 사진촬영을 한 후 본부석 주변으로 돌아온 기자가 “미세한데요.”라고 말했고, 양창연과 형제 이상의 관계인 권병훈은 “조금 질 것 같아.” 하며 우울한 얘기를 누구에게 내뱉는다. 사실 기자도 약간 모자라는 건 알았지만 듣는 누군가가 속상할 것 같아서 ‘미세하다’고 했던 참이다.


“그래도 양원장이 이길 거예요.”


바로 본부석에는 양창연의 아내 이은영 씨가 이틀간 행사를 도와주고 있었고 그녀도 바둑엔 눈치코치가 이미 9단이다. 성환 지환 쌍둥이 아들과 딸 서연까지 세 꼬맹이를 키워냈던 억척스런 아내도 조민수가 어려운 상대라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3분 후. 계가가 끝났는지 조민수가 재빨리 돌을 쓸어 담으면서 “양사범 축하해!” 하는 게 아닌가. 호탕한 조민수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들렸다. ‘아니, 이 무슨?’


시니어 바둑은 늘 그러하지만 ‘그분’이 자주 온다. 조민수가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양창연에 패한 날도 ‘그분’이 오신 게다.


▲늘 '양원장'을 응원하는 아내 이은영 씨가 결승경기에 앞서 체력이 약한 남편에게 무릎 담요를 덮어주면서 '화이팅'을 불어넣는다. 


이제 결승이다. 유창혁을 혼내줬던 '끝장승부의 달인' 안재성이다. 안재성도 양창연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는 쪽은 아니다. 


경기가 개시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상대를 기다리는 안재성과 달리 양창연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 처럼 조민수에게 대역전을 거둔 자신이 믿기지 않은 들뜬 분위기. 사실 주변에서 더 흥분했다. 하긴 15연패를 끊었으니….


조민수가 다가와서 “잘 둬요 양사범!” 노골적으로 양창연에게 응원을 해주며 떠났고, 그를 똑똑히 들었던 안재성도 빙긋 웃으면서 싫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잘 둬서 이겨 가!’


이게 다 이삼십년 함께 샅바를 잡아보고 내준 동지애라는 건가. 개시 전 잠시 체육관 공기가 싸늘해진다 싶자 재빨리 양창연의 아내가 무릎 담요를 덮어주면서 짧은 포옹도 잊지 않는다. 


시작하자마자 안재성의 집중포화는 우하방면 흑말에 집중된다.(아래 기보 참조) 거의 초반부터 양창연을 글로기로 몰아가며 안재성의 낙승 쾌승이 예상되는 찰나였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안재성이 한 수만 꽉 찝으면 흑 대마가 혼비백산할 순간, 살짝 느슨해지자 거꾸로 양창연이 흑87로 눈을 만들면서 대마는 그만 완생이다. 


안재성은 약간 더 두다가 판을 이미 버려놓았다는 듯 싹싹하게 돌을 거두면서 후배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악수을 건넸다. “양사범 축하해!”   


▲이창호배 시니어여성부 결승(1~127)  흑 양창연     백 안재성


▲이창호배 결승 안재성-양창연.


양창연은 평생 바둑을 두었고 바둑 가르치는 일이 즐거운 바둑인이다. 이제 나이 50을 넘기면서 고향 전주를 위해, 아니 전북바둑계를 위해 뛰는 자신이 대견하다.


전북대 선배 권병훈과 쌍두마차라는 건 다들 안다. 아직 힘에 부치지만 둘이 함께라면 개의치 않는다. 이미 바둑일보에 기사화도 조금 된 바 있지만 2016년부터 전북 동호인을 규합하여 그들을 DB화 했고, 각종 동호인대회로 스스로 개최하는 등 과거엔 바둑행정을 하는 다른 분이 신경쓰던 일을 선수 둘이서 스스로 해내고 있다. 


전북유단자대회  전국동호인리그 등이 그것이다. 물론 완주군수배, 김제지평선배, 춘향배, 이창호배, 진안마이산배 등 전북 내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지역대회도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대회다운 대회가 진행된다. 


“사실 제가 전주에서 서울로 부산으로 태백으로 운전을 해서 대회에 참여하다보니 체력이 약한 저로서는 집중하기가 어렵죠. 또 제가 전북협회 이사에요. 아무래도 선수로서는 조금 소홀해지는 면도 있을 거고요.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하다보면 결실은 꼭 오는 것 같아요.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이네요.” 


▲'전북바둑은 우리가 이끈다!' 친형제 못지 않은 우애를 과시하며 전북바둑의 대들보 역할을 맡은 양창연 권병훈. 사진은 지역의 젊은 고수들과 페어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양창연 양동일-권병훈 우상범. 


▲시니어여성부 대진 추첨을 실시하고 있는 '선수' 겸 '진행자' 양창연(오른쪽).


▲아내 이은영 씨는 입상자인 남편 양창연의 주소와 계좌번호를 받고 있다. 


▲"양사범님 축하합니다!" 전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정찬호가 양창연의 우승 소식을 접하고 양창연에게 진심어린 축하의 꽃다발을 전해주고 있다. 개막식같은 데서 준비된 요식행위로서의 꽃다발이 아니라 진심어린 축하의 꽃다발을 직접 장만해서 온 건 바둑대회에선 참으로 오랜만이다.  


※ 이 기사는 현장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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